84 X 120
회화
1998
<삶의 무게>(1998)는 한자가 쓰인 고서적을 바탕으로, 그 중앙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격자 모양의 틀을 따라 적힌 장면을 고영훈 특유의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책 위에는 오래된 냄비와 찌그러진 저울이 놓여있는데, 왼쪽의 낡은 냄비는 뒤집어진 상태로 밑면이 보이며 짝 잃은 날개 한쪽이 붙어 있다. 그런가하면 그 오른편에는 찌그러진 저울의 계기판이 있다. 기울어진 바늘만이 그 무게를 짐작하게 할 뿐 계량되는 대상은 그림에 나타나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냄비와 저울, 고서적은 모두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도상이며, 짝을 잃어 날 수 없는 날개는 마치 현실의 한계를 상징하는 듯하다. 실재와 환영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을 만큼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 작품은 사물의 낯선 결합으로 새로운 미적 체험을 선사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통해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