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1.5cm
한국화
1986
천경자는 한국 채색화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창출한 화가이다. 천경자의 회화는 채색화가 대표적이지만 이외에도 기행회화, 수묵담채화, 삽화, 드로잉 등의 작품들도 많이 남아있다. 1969년부터는 30여 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기행회화는 해외여행에서 느낀 감흥과 순간을 포착하여 스케치한 후 채색한 그림들로, 해외여행을 통해 이루어낸 천경자 회화의 독립 장르이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의 기행 스케치화는 여행지에서 빠르게 펜이나 연필로 그린 후 수성물감을 사용하여 엷게 채색했다. 1969년 남태평양 군도와 유럽에서 그린 기행회화는 빠르게 펜이나 연필로 그린 후 엷게 채색한 선묘 중심의 데생력이 돋보인다. 1974년 아프리카 기행부터는 원시적인 미감을 반영하여 스케치 선묘 위에 과슈로 채색하였고, 기행회화는 선명도 높은 원색적인 화면으로 변모되었다. 기행 초기에는 현장 스케치화들이 많은 반면 여행이 거듭될수록 화려한 색감과 환상적인 화면구성이 돋보이는 완성도 높은 채색화로 고착되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서 천경자는 기행회화를 단순히 기록화의 개념에서 벗어나 독특하고 신비한 담긴 화면을 창출해냈으며, 채색화의 독립된 장르로 완성시켰다. <발리섬의 무희>(1986)는 무희를 소재로 그린 여성인물화이다. 1980년대 중후반 천경자는 해외여행 중 주요 소재로 채택했던 정취와 풍물보다 무희를 스케치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전까지 무희 스케치들은 춤을 추고 있는 동세에 초점을 두었던 반면 이 그림에서는 무희의 화려한 문양 옷과 장신구와 같은 장식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대상의 선명한 형태를 강조하여 한결 더 명확하게 장식적이고 다채로운 색채를 부각시켰다. 무희의 의상, 장신구는 사실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그렸으며, 눈동자와 장신구에 금분을 많이 사용하여 색채에 의한 장식성을 강조한다. 천경자는 1980년대 중반부터 이국 여인의 얼굴과 눈매는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초월적인 여인상으로 규정짓고 있다. 가늘고 긴 눈매는 더욱 커졌고 눈동자에 금분을 가득 채워 강렬한 마녀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천경자 여성인물화의 붉은색, 청색의 입체 화장을 한 것 같은 눈매는 발리 무희들의 화장한 모습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여인의 콧잔등이 하얗게 강조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 같은 표현은 <황금의 비>(1982)에서 얼핏 나타나기 시작했다. 입체 화장을 한 것 같은 여인은 천경자가 ‘아름다운 여자’하면 떠올리던 동네 미친 여자들이거나, 평소 화장하기를 좋아했던 화가 자신과 동일시 된다. 이러한 여인상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채색화와 기행회화의 구분없이 천경자 여성인물화의 정형화된 표현이며 회화적으로 강조되는 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