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7cm
한국화
1981
천경자는 한국 채색화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창출한 화가이다. 천경자의 회화는 채색화가 대표적이지만 이외에도 기행회화, 수묵담채화, 삽화, 드로잉 등의 작품들도 많이 남아있다. 1969년부터는 30여 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기행회화는 해외여행에서 느낀 감흥과 순간을 포착하여 스케치한 후 채색한 그림들로, 해외여행을 통해 이루어낸 천경자 회화의 독립 장르이다. 천경자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문학과 영화예술의 현장을 찾았다. 그가 학생시절부터 가졌던 남다른 취미는 문학작품과 영화를 즐기는 것이었다. 영화, 연극, 유행가, 춤은 세월이 흐를수록 취미를 넘어선 천경자의 예술적 소양이 되었고, 고독한 삶을 위로 해주는 수단이자 작품의 소재였다. 천경자가 세계적인 문호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며 남긴 화폭과 수필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드러나는 대목이 종종 발견된다. 끊임없이 인간 본연의 원초적인 원시성을 찾아다니면서도 문명지 유럽과 미국의 문화예술에 심취했던 작가는 섬세한 묘사 위주의 사실적 화풍을 보여주면서도 구도와 색채 변화를 주어 꿈과 사랑, 환상의 세계를 화면에 담아내었다. <폭풍의 언덕>(1981)은 소설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되었던 영국 요크셔지역 하워스를 그린 작품이다. 평소 문학작품에 심취했던 천경자는 『폭풍의 언덕』의 저자 에밀리 브론테의 흔적을 찾아 여행했다. 작가는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천경자 자신과 가족 중 누군가의 분신일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주인공의 불행과 고독, 사랑의 향수에 자신을 대입시켰다. 자신에게 내재된 슬픔, 불행, 고독 같은 감정을 작품의 소재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조금은 불우해야 예술이 된다.”고 여겼다. 천경자는 브론테 가족 묘지를 지나 위치한 습지대 언덕에서 스케치했다. 화면에는 말라버린 검붉은 관목 히스와 누런 갈대밭이 거센 바람에 몰아치고 있다. 회색빛 하늘과 맞닿은 황량한 황무지, 바람에 휘감기듯 흔들리는 갈대를 포착했다. 노랑과 갈색 계열의 색채로 여러 겹 붓질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연상되도록 시각적 환영을 준다. 지평선을 화면 상단에 설정하여 작은 화폭임에도 불구하고 시야를 멀리 확장시켜준다. 톤 다운된 색채는 계절감과 감정을 표출해주고 있다. 천경자의 문학적 감수성을 담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