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5×72.5cm
한국화
1973
천경자는 전통 채색화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창출한 화가이다. 그는 형식적 전통주의 한계에서 벗어나 채색을 고수하면서도 다양한 조형실험으로 개성적인 화법을 구현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화기법을 동양화 재료에 적용시켰고 색의 중첩에 의한 균질한 화면을 연출함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채색화법을 만들었다. 천경자 회화세계의 의미는 채색화의 명맥을 이어왔다는 점보다 독자적인 해석에 의한 인물의 창조에 있다 . 졸업 후 섬세한 묘사 위주의 사실적 화풍은 1950년대 전반기부터 천경자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투영한 형태와 색채의 상징화가 이루어지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작품에 자전적 요소가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 화려한 꽃으로 둘러싸인 가족과 여인을 소재로 작품을 그렸다. ‘꽃과 여인’이라는 특정 소재가 등장했고 자유로운 구도와 환상적인 화면으로 전환되었으며, 1970년대 초반 무렵부터 초상화 형식의 여성인물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73년작 <길례언니>를 기점으로 동공을 하얗게 칠하고 허공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우수에 가득 찬 여성인물화가 양식화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천경자는 ‘자전적 여인상’, ‘초월적 여인상’으로 주제를 설정하고 작품의 상징성을 도모하였다. 천경자 회화의 상징성은 자신의 삶에 기인한 고독과 한, 내면세계를 표출한 것에서 비롯된다. 천경자 여인상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부분은 눈동자이며, 작가는 눈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전달하고자 했다. 1980년대부터 대부분의 자전적 여인상은 이국적 소재와 도상이 화면에 재구성되면서, 작가 자신의 삶을 투영시킨 상징이 되었다. 이후 고대 이집트 문명의 내세관을 모티프로 구현되기 시작한 금빛 눈동자와 초월적인 여인상은 1990년대까지 지속된 천경자 회화의 조형언어로 고착되었다. <이탈리아 기행>(1973)은 피렌체의 인상을 바탕으로 3년여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1970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고,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서 깊은 감명과 충격을 받았다. 전통의 맥락에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였고, 이는 자신의 회화세계에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에는 여정 중의 강한 인상을 주었던 도상이 등장한다. 화면의 중심에는 보티첼리의 화집, 오른쪽에 프라 안젤리코의 <이집트의 피신(Flight into Egypt)>(1451-52) 엽서와 왼쪽 상단에는 천경자의 기행 스케치화 <베니스 산마르코 사원>(1970)이 놓여있다. 특히 천경자는 피렌체에서 보았던 보티첼리 작품 <봄>(1478)에 매료되었다. 화집을 소재로 채택한 것은 보티첼리 작품 <봄>을 보았던 순간 느꼈던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나타낸다. <이집트의 피신> 엽서는 경험과 아프리카를 향한 열망을 상징한다. 그리고 천경자 자신의 그림을 삽입하여 이탈리아 여정의 감흥을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장갑, 매니큐어를 칠한 손, 트럼프, 술병 등 주요 도상들은 이 작품에서 처음 단체로 등장하여 말년 작품까지 지속된다. 트럼프는 자신의 감정 상태, 술병은 고독했던 여정, 손은 신체의 일부를 나타낸다. 천경자는 소재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대변한다. 꽃, 동물?식물, 특정 사물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고 상징성을 도모했다. <이탈리아 기행>은 1970년대 천경자 회화양식 형성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