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129cm
한국화
1995
천경자는 전통 채색화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창출한 화가이다. 그는 형식적 전통주의 한계에서 벗어나 채색을 고수하면서도 다양한 조형실험으로 개성적인 화법을 구현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화기법을 동양화 재료에 적용시켰고 색의 중첩에 의한 균질한 화면을 연출함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채색화법을 만들었다. 천경자 회화세계의 의미는 채색화의 명맥을 이어왔다는 점보다 독자적인 해석에 의한 인물의 창조에 있다 . 졸업 후 섬세한 묘사 위주의 사실적 화풍은 1950년대 전반기부터 천경자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투영한 형태와 색채의 상징화가 이루어지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작품에 자전적 요소가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 화려한 꽃으로 둘러싸인 가족과 여인을 소재로 작품을 그렸다. ‘꽃과 여인’이라는 특정 소재가 등장했고 자유로운 구도와 환상적인 화면으로 전환되었으며, 1970년대 초반 무렵부터 초상화 형식의 여성인물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73년작 <길례언니>를 기점으로 동공을 하얗게 칠하고 허공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우수에 가득 찬 여성인물화가 양식화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천경자는 ‘자전적 여인상’, ‘초월적 여인상’으로 주제를 설정하고 작품의 상징성을 도모하였다. 천경자 회화의 상징성은 자신의 삶에 기인한 고독과 한, 내면세계를 표출한 것에서 비롯된다. 천경자 여인상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부분은 눈동자이며, 작가는 눈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전달하고자 했다. 1980년대부터 대부분의 자전적 여인상은 이국적 소재와 도상이 화면에 재구성되면서, 작가 자신의 삶을 투영시킨 상징이 되었다. 이후 고대 이집트 문명의 내세관을 모티프로 구현되기 시작한 금빛 눈동자와 초월적인 여인상은 1990년대까지 지속된 천경자 회화의 조형언어로 고착되었다. <황혼의 통곡(미완성)>(1995)은 누드 군상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메마른 대지 위에 나체 여인들은 엎드리거나 턱을 괴거나 또는 고통스럽게 허리를 꺾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화면 중앙의 여인은 <누가 울어>Ⅰ(1988), 그 뒤로 목 놓아 울고 있는 여인은〈초원>Ⅱ(1978)의 누드를 떠올리게 한다. 여인들 옆에는 천경자 자신이 키우던 애완견, 뱀, 꽃, 장갑, 카드가 놓여 있다. 여인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에는 금분이 선명하게 채색되어 강렬한 마녀 이미지를 강조하면서도 눈망울엔 애상이 가득하다. 여인을 위로하듯 곁에 있는 애완견마저 슬픔이 맺혀있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천경자는 자신의 삶과 창작과정에서 초래된 저항과 고통을 다시 표상하고 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며 목놓아 울고 싶은 심정을 메마른 대지 위에 통곡하는 여인으로, 구름 사이로 떠도는 여인을 통해 현실과 미래가 공존하는 초현실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