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21.5cm
한국화
1970
천경자는 한국 채색화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창출한 화가이다. 천경자의 회화는 채색화가 대표적이지만 이외에도 기행회화, 수묵담채화, 삽화, 드로잉 등의 작품들도 많이 남아있다. 1969년부터는 30여 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기행회화는 해외여행에서 느낀 감흥과 순간을 포착하여 스케치한 후 채색한 그림들로, 해외여행을 통해 이루어낸 천경자 회화의 독립 장르이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의 기행 스케치화는 여행지에서 빠르게 펜이나 연필로 그린 후 수성물감을 사용하여 엷게 채색했다. 1969년 남태평양 군도와 유럽에서 그린 기행회화는 빠르게 펜이나 연필로 그린 후 엷게 채색한 선묘 중심의 데생력이 돋보인다. 1974년 아프리카 기행부터는 원시적인 미감을 반영하여 스케치 선묘 위에 과슈로 채색하였고, 기행회화는 선명도 높은 원색적인 화면으로 변모되었다. 기행 초기에는 현장 스케치화들이 많은 반면 여행이 거듭될수록 화려한 색감과 환상적인 화면구성이 돋보이는 완성도 높은 채색화로 고착되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서 천경자는 기행회화를 단순히 기록화의 개념에서 벗어나 독특하고 신비한 담긴 화면을 창출해냈으며, 채색화의 독립된 장르로 완성시켰다. <안나 마리아>(1970)는 선술집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스케치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대종교 행사 때문에 플라멩코의 본 고장 세비야 여행을 포기하고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선술집에서 스케치를 했다. 노래 \'안나 마리아\'와 기타연주자의 리듬, 박수소리에 맞춰 현란하게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무희들을 거침없이 속필로 그려나간 스케치화가 여러 점 남아있다. 바르셀로나에서 스케치는 춤동작보다 무희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그림들 몇 점이 확인된다. 천경자는 바르셀로나 무희들의 슬픈 표정에 주목했고, 플라멩코는 슬픔의 미학이 서린 움직이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스케치의 여인의 눈은 우수에 찬 듯한 눈빛으로 관객을 향해있다. 구불구불 빠르게 그려나간 소매자락의 흐름에서 플라멩코의 리듬이 감지된다. 천경자는 순간순간 변하는 동작과 표정을 하나의 화면에 구성하여 그리곤 했는데, 이는 공연 장면을 스케치 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다. 특히 움직이는 대상을 스케치할 때 머뭇거림이나 동세의 어색함이 없고 자유롭게 구사한 선의 흐름은 천경자의 데생력을 더욱 부각시켜준다. 현장에서 사생하여 순간을 포착한 기행 스케치화는 천경자의 작가적 순발력과 회화성을 엿볼 수 있다.